선고일 아침에 법정으로 걸어 들어갔던 사람이 그날 저녁 구치소에서 잠들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전과가 없었고, 사정을 들어 보면 참작할 대목도 있었습니다. 재판 중에 법원에 돈도 걸어 두었습니다. 공탁이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와의 합의는 끝내 없었고, 재판부는 실형을 선고하면서 그 자리에서 구속했습니다.
이 글은 그 가해자의 자리에서 씁니다. 선고 전날 밤, 그가 무엇을 알았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보다 앞선 시점들 — 공판 중, 송치 뒤, 경찰 조사 전, 사고 직후 — 에 무엇을 했어야 했는지. 마지막에는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이 자기 사건의 어느 칸에 서 있는지 스스로 가릴 수 있는 점검표를 붙였습니다. 먼저 분명히 해 두겠습니다. 합의가 없으면 반드시 실형이라는 공식은 없습니다. 다만 피해가 큰 사건에서 합의라는 칸이 비어 있으면 다른 사정들로는 그 칸을 채우기 어렵다는 것이 이 사건이 보여 주는 현실입니다.
선고 전날 밤 — 그가 몰랐던 것 하나
선고 전날 밤 가해자의 손에는 공탁 영수증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피해 회복의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틀린 믿음은 아니었지만, 절반만 맞는 믿음이었습니다. 공탁 영수증이 증명하는 것은 ‘가해자가 돈을 법원에 맡겼다’는 사실입니다.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피해자가 그 돈을 받을 마음이 있는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했는지’입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공탁금에 손대지 않았고, 처벌을 원한다는 뜻을 법원에 따로 내 두었습니다. 재판부가 영수증에서 읽은 것은 ‘피해 회복’이 아니라 ‘피해자가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였습니다.
그가 선고 전날 밤에 알았어야 했던 것은 이것입니다. 합의서와 공탁 영수증은 같은 자리에 놓이는 서류가 아니라는 것. 전자에는 피해자의 마음이 적혀 있고, 후자에는 가해자의 행동만 적혀 있습니다. 재판부는 전자를 형을 정할 때 가장 크게 보는 사정 가운데 하나로 두지만, 후자는 여러 사정 중 하나로 곁들여 볼 뿐입니다.
| 항목 | 피해자와 직접 합의 | 법원에 공탁 |
|---|---|---|
| 누구의 의사인가 | 피해자 —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문서로 | 가해자 — 돈을 맡기겠다는 뜻만 |
| 재판부가 읽는 것 | 피해가 회복됐고 피해자가 받아들였다 |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돈을 걸어 두었다 |
| 양형에서의 자리 | 주요 감경 사유 | 참작 사유 중 하나 — 합의를 대체하지 못함 |
| 누가 할 수 있는가 | 피해자가 받아 주어야 가능 | 가해자 혼자서도 가능 |
| 피해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 애초에 이루어지지 않음 | 찾아가지 않은 공탁금과 처벌 의사가 함께 기록돼 가해자에게 거꾸로 작용할 수 있음 |
형사공탁 특례가 만든 착각
공탁이 합의를 대신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진 데는 배경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지 못하면 공탁을 걸 수 없었고, 피해자가 연락을 끊으면 공탁이라는 선택지 자체가 막혀 있었습니다. 형사공탁 특례가 시행되면서 사건번호만으로 공탁이 가능해졌고,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안 되면 공탁하면 된다”는 말이 흔해졌습니다.
그러나 제도가 공탁을 쉽게 만들었다는 것과 재판부가 공탁을 합의처럼 본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공탁이 쉬워진 만큼, 재판부는 ‘합의를 시도했는데 거부당해 공탁에 이른 것인지, 시도도 없이 공탁으로 간 것인지’를 더 자세히 봅니다. 피해자 쪽에서 공탁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견을 법원에 내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공탁은 합의의 대체재가 아니라, 합의를 충분히 시도한 뒤에야 의미를 갖는 보완재입니다.
피해자가 공탁을 ‘거래’로 느끼는 순간
이 사건의 피해자가 공탁금을 거부한 이유는 금액이 적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고 뒤 몇 달 동안 가해자로부터 한 번도 사과를 받지 못했는데, 선고를 앞두고 갑자기 법원에 돈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에게 그 공탁은 ‘형량을 줄이기 위한 거래 제안’으로 읽혔습니다. 같은 금액이 사고 한 달 뒤에 사과와 함께 전달됐다면 전혀 다르게 읽혔을 것입니다.
가해자는 흔히 금액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이 그래서 나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닫히는 지점은 금액이 아니라 순서입니다. 사과가 먼저 오고 금액이 나중에 오면 금액은 사과의 연장으로 읽히고, 금액이 먼저 오면 사과조차 거래의 일부로 읽힙니다. 선고 직전의 공탁은 순서가 가장 심하게 뒤집힌 형태입니다.
시점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일
선고일에서 사고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가해자에게는 합의가 성사될 수 있었던 지점이 적어도 네 번 있었습니다.
| 시점 | 그가 한 일 | 할 수 있었던 일 |
|---|---|---|
| 사고 직후 | 보험 접수 뒤 피해자 측에 “보험 처리되니 치료는 다 될 겁니다”라고 전함 | 치료비와 별개로 사과를 전하고, 피해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겠다는 뜻을 전달 |
| 경찰 조사 | 혼자 출석해 사고 경위만 진술 | 수사관에게 사과를 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고, 운전자보험의 변호사비·형사합의금 담보 확인 |
| 송치 후 | 검찰 연락을 기다리며 돈을 모음 | 사고 경위와 적용 조항이 정리된 시점 — 대리인을 통해 사과와 합의 의사를 공식 전달 |
| 기소 후 공판 중 | 공판기일에 출석만 함 | 공소사실을 확인하고 합의 범위를 정해 제안, 거부당하면 그 기록을 남김 |
| 선고 직전 | 공탁 | (앞 단계의 기록이 있었다면 이 공탁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흔적이 됐을 것) |
표의 마지막 행이 중요합니다. 같은 공탁이라도 앞 네 행이 채워진 뒤의 공탁과 비어 있는 채의 공탁은 다르게 읽힙니다. 이 가해자의 공탁이 힘을 쓰지 못한 것은 공탁 자체가 잘못돼서가 아니라, 그 앞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가진단 — 지금 내 사건은 어느 칸이 비어 있는가
합의가 이루어진 사건들을 보면 네 칸이 거의 채워져 있고, 공탁으로 끝난 사건들을 보면 그중 두세 칸이 비어 있습니다. 아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 보십시오. ‘아니오’가 나오는 칸이 지금 메워야 할 자리입니다.
| 칸 | 스스로에게 물을 것 | ‘아니오’라면 생기는 일 | 메우는 방법 |
|---|---|---|---|
| 감정 | 피해자 쪽에서 내 연락을 받을 여지가 남아 있는가. 없다면 언제 어떤 말로 닫혔는가 | 액수를 키워도 응답이 없음 | 돈 이야기를 접고, 대리인을 거쳐 사과문 전달과 치료 상황 파악부터 |
| 타이밍 | 첫 사과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전달됐는가 | 같은 금액이 거래 제안으로 읽힘 | 지금이 가장 이른 시점 — 더 미루지 말고 오늘 사과 전달 경로를 찾기 |
| 금액 | 피해의 무게, 내가 실제로 마련할 수 있는 돈, 보험에서 열리는 범위를 한 표에 놓고 봤는가 | 증권의 한도만 믿다가 피해자의 기대와 크게 벌어짐 | 보험사에 이 사건의 지급 범위를 확인하고, 피해자 상태가 드러난 뒤 범위를 정함 |
| 표현 | 내 형을 낮추려는 문장을 쓰고 있는가, 상대의 피해를 알아듣는 문장을 쓰고 있는가 | 보험 이야기 한 줄에 대화가 닫힘 | 아래 표에서 내가 쓴 문장을 찾아 바꾸기 |
네 칸 중 돈이 해결하는 칸은 하나입니다. 남은 세 칸을 채우는 것은 시점, 문장, 그리고 상대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합의가 막힌 사건에서 액수를 더 모으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은 어느 칸이 비었는지 찾는 것입니다.
피해야 할 말, 대신 할 말
| 이 말을 했다면 | 피해자에게 이렇게 들립니다 | 이렇게 바꾸십시오 |
|---|---|---|
| “보험 처리는 다 되잖아요” | 내 고통을 치료비 문제로 줄이는 말 | “치료비는 보험에서 나가더라도, 제가 끼친 일에 대해서는 따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
| “왜 합의를 안 해 주시나요” | 합의가 내 의무라는 말 | “합의를 재촉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
| “저도 초범이고 사정이 있어서요” | 가해자 사정을 나에게 떠넘기는 말 | (이 사정은 법원에 제출할 서류에 담을 내용이지 피해자 앞에서 꺼낼 말이 아닙니다) |
| “얼마면 되겠습니까” | 사과도 없이 흥정부터 하자는 말 | “지금 몸은 좀 어떠신지부터 여쭙고 싶습니다” |
피해자가 연락을 거부했다면 — 멈추고, 남기고, 순서대로
연락을 원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면 거기서 멈추는 것이 맞습니다. 그 뒤에도 전화를 걸거나 병원·집으로 찾아가면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 괴롭힘으로 남고, 재판부는 그것을 2차 피해로 볼 수 있습니다. 멈춘 다음에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거부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을 만드십시오. 대리인을 거쳐 ‘연락을 원치 않으신다는 뜻을 들었고 그대로 따르겠다’는 내용을 전하고 보관합니다. 둘째, 수사관이나 대리인을 거쳐 사과문만이라도 전달될 수 있는지 알아보십시오. 셋째, 피해자의 회복 상황을 직접이 아닌 경로로 파악하십시오. 이 세 가지가 먼저 있고 난 뒤의 공탁이라야 ‘가해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자료가 됩니다.
지금 어느 단계에 있든 아직 할 수 있는 일
- 경찰 조사 전이라면 — 수사관에게 사과 전달 경로를 묻고, 운전자보험의 변호사비 담보가 경찰 단계부터 열리는지 확인하십시오. 금액 이야기는 그다음입니다.
- 송치·기소 사이라면 —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사고 경위가 정리된 시점이므로 대리인을 거쳐 사과의 뜻과 합의할 뜻을 문서로 전하십시오.
- 재판이 진행 중이라면 — 공탁을 고려하기 전에 합의 시도의 기록을 남기십시오. 거부당한 뒤의 공탁과 시도 없는 공탁은 다르게 읽힙니다.
- 선고가 임박했다면 — 공탁과 함께, 그동안의 사과 시도와 거부 경위, 피해 회복을 위해 한 일을 정리한 자료를 내십시오. 영수증 한 장만 내는 것과는 다르게 읽힙니다.
운전자보험이 있다면 변호사선임비 담보가 경찰 단계부터 열리는지 확인하는 것도 이 시점에 해야 할 일입니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직접 통화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는 사건에서는 변호사를 통한 전달이 대화를 여는 유일한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이 글의 사건에서 가해자가 선고일에 들었던 말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였습니다. 그 한 문장 뒤에는 사고 직후의 한마디, 경찰 단계에서 묻지 않은 질문, 송치 뒤 흘려보낸 시간, 공판 중 하지 않은 제안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지금 사건의 어느 단계에 있든, 그 쌓임을 멈출 수 있는 지점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유튜브 구독자 38만 명의 '보상과배상TV'를 운영하는 보상과배상 법률사무소가 작성했습니다. 저희는 교통사고 형사사건에서 가해자 방어를 집중적으로 수행하며, 대한변호사협회에 교통사고 전문분야로 정식 등록된 장슬기 변호사(제2019-1310호)와 전경근 변호사(제2023-1100호)가 직접 진행합니다. 본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개별 사안의 결과는 구체적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영상으로 보기
같은 내용을 변호사가 직접 설명한 영상입니다.
- #공탁후법정구속
- #형사공탁과합의차이
- #형사합의점검표
- #경찰단계사과전달
- #중상해형사합의시기
- #가해자합의타이밍
- #형사공탁특례착각
이 주제에서 자주 묻는 질문
Q. 공탁을 해 두면 합의를 못 해도 집행유예가 나오나요?
보장되지 않습니다. 공탁은 피해 회복 의지를 보여 주는 여러 사정 중 하나로 참작될 수 있지만, 피해자가 수령을 거부하고 처벌 의사를 유지하면 합의와 같은 무게로 읽히지 않습니다. 합의 시도 없이 공탁만 한 사건이 선고일에 구속되기도 합니다.
Q. 형사공탁 특례로 피해자 정보 없이도 공탁할 수 있게 됐는데, 그러면 합의가 필요 없는 것 아닌가요?
제도가 공탁을 쉽게 만든 것과 재판부가 공탁을 합의처럼 보는 것은 다릅니다. 공탁이 쉬워진 만큼 재판부는 합의를 시도했는지, 거부당한 뒤의 공탁인지를 더 자세히 봅니다. 공탁은 합의의 대체재가 아니라 충분히 시도한 뒤의 보완재입니다.
Q. 합의 시도를 했는데 거부당했습니다. 그래도 공탁이 의미가 있나요?
있습니다. 사과와 합의 시도의 기록이 먼저 있고 그 뒤에 공탁이 이루어졌다면, 가해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자료로 읽힐 수 있습니다. 시도 없이 바로 공탁한 것과는 평가가 다릅니다. 공탁과 함께 시도 경위를 정리한 서면을 내십시오.
Q. 경찰 조사 단계에서 피해자에게 연락해도 되나요?
직접 연락보다 수사관에게 사과를 전할 길이 있는지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피해자가 괜찮다고 하면 길이 열리고, 싫다고 하면 거기서 멈춰야 합니다. 거듭된 연락은 괴롭힘으로 남습니다.
Q. 피해자가 연락을 거부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나요?
남은 수단이 있습니다. 거부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을 만들고, 수사관이나 대리인을 거친 사과문 전달, 직접이 아닌 경로로 회복 상황 파악, 그다음에 공탁 순서로 검토할 수 있습니다. 거부를 받아들인 기록 자체가 재판부에 읽힙니다.
Q. 합의금을 많이 준비했는데도 합의가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금액이 아니라 다른 칸이 비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첫 사과가 너무 늦었거나, 사고 직후 보험 이야기부터 꺼내 감정이 닫혔거나, 처벌을 줄이려는 말로 들리는 표현을 썼다면 금액을 올려도 대화가 열리지 않습니다. 본문의 자가진단 표로 비어 있는 칸을 찾으십시오.
Q. 중상해 피해자와는 언제 합의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요?
사과와 치료 경과 확인이 먼저이고 금액은 그다음입니다. 수술이나 재활이 남아 있어 상태가 확정되지 않은 시기에 금액부터 제시하면 오히려 합의가 멀어질 수 있습니다. 사과는 빨리, 금액 협상은 상태를 보며 시기를 정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더 많은 질문은 자주 묻는 질문 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